[김준곤목사 이야기]┃딸의 죽음, 그 존재의 제로점에서

2012. 11. 8. 17:10행복한 일상/행복한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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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죽음, 그 존재의 제로점에서

글 I 김준곤

 

신희는 만 29세를 일기로 세 살과 다섯 살 난 두 딸과 남편을 남겨 놓고 주님의 부름을 받아 세상을 떠나갔다.

신희의 병환은 어쩌다 늦게사 발견되어 1981년 12월에 개복수술을 받은 때는 이미 위암 말기였다. 집도의의 말에 따르면 수술 중 그냥 덮어버릴까 하다가 수술을 계속 진행했는데 위와 비장 전부를 몽땅 잘라내고 간장 일부와 췌장 일부까지 절제한 후 소장 일부를 잘라서 대용 위를 만들었다고 한다.

신희는 가냘프고 순하며 얼굴도 곱고 공부도 잘하는데다, 마음과 성품은 더 고와서 나무랄 데가 없는 아이였다. 30년을 키웠지만 저만치 호젓이 미안하게 태어나 사는 아이처럼, 태어난 지 3개월만에 광마처럼 뛰는 털털이 만원버스를 타고 네 시간을 가는 동안에도, 많은 사람들은 멀미를 하고 아우성인데 신희만은 쌕쌕거리며 예쁘게 잠을 잘 잤던 고마운 기억도 있다. 하루종일 나와 내 아내가 학교에 갔다가 돌아왔을 때 집보는 아이가 신희를 입술이 마를 정도로 굶겨놔도 울질 않아서 젖을 못 얻어먹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걱정을 안 끼치려고 그런건지 아무리 아파도 꾹 참아버리는 신희의 그 성격이 암을 4기가 될 때까지 참아버리게 한 것이었으리라.

신희의 최대 공포는 참을 수 없는 극한 고통이었다.

수술한 날로부터 167일 동안 다른 암환자들은 단속적(斷續的)으로 통증이 온다는데 신희는 끊임없이 육체의 극한 고통을 받다가 갔다. 끊임없이 토하고 국물만 먹어도 장이 유착되는데다 장 전면에 퍼진 암 때문에 장기능이 마비되어 아무리 관장을 해도 보름씩 변이 차고 가스가 찼다. 나중에는 복수가 차서 배가 터질 것 같은 팽만감에다 간 장애로 호흡곤란까지 겹쳤다. 집에 있을 때, 깊은 밤이 되면 식구들에게 방해가 안 되도록 텅 빈 응접실에 혼자 몰래 나와서 그 무서운 복통을 참느라고 몸을 비틀며 울면서 신음하던 것을 나는 볼 수 있었다.

진통제들이 잘 듣지 않아 몰핀을 써야 하는데 말기 암환자에게는 몰핀도 듣지 않게 되는 경우가 많아 의사들은 최후까지 몰핀 쓰는 일에 인색하여 많은 암환자들이 죽기 전 일주일 정도는 거의 광란 상태로 들어간다고 한다.

그러나 그 오랜 투병기간 동안 밤이면 혼자 울어 눈이 부었는데도 누구보다 먼저 세수를 했으며 식구들이 보는 데서는 결코 울지 않았고 너무나 태연했다. 문병온 사람들이 울어도 신희는 일부러 태연했다.

신희를 보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기도밖에 없었다. 신희가 토할 때마다 나는 내 죄를 창자까지 토했고 자나깨나 앉으나 서나 주님과 신희를 번갈아 부르며 숨쉬듯 기도했으나 내 생애의 가장 애절한 기도는 무참히 거절당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나와 아내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순종과 수락을 결심하면서부터 지각에 뛰어난 평강이 왔다.

모세의 40년 간의 기도는 요단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느보산 꼭대기에서 요단 건너 땅을 바라만 보게 하시고, “너는 들어가지 못한다.”는 거절을 생애 최후의 선물로 주셨다.

주님의 절대 사랑과 어떤 상황에서도 승리하는 힘을 주실 것에 대한 신뢰와 신앙을 나는 다시 고백하고 다시 확인해야 하는 과제 앞에 서게 되었다. 아비된 자로서 열두 번 신희를 대신하고 싶었지만 고통과 죽음만은 대신할 수 없는 것, 오직 주님만이 신희를 대신할 수 있었다.

세상 떠나기 전 날, 신희는 쌕쌕 잠든 상태에 있다가 식구들 하나 하나에게 그리도 맑고 평화스런 눈동자로 미소를 지으면서 반갑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같이 기도할 수 있겠니?”하면

“주여….” 하고는 언어 장애를 알리느라고 손가락으로 입과 머리 부분을 가리키며 잘 안돌아간다는 신호를 했다.

죽던 날 아침 8시에 내가 가서 기도해 주고 아내도 신희도 잠시 잠든 것 같아서 병실 문을 나오려고 하는데 신희가 손을 들고 “아빠, 아빠.”부르더니 “기도,기도.” 두 마디를 외쳤다. 내가 붙잡고 기도했더니 신희는 다시 잠이 들었다. 마음을 놓고 사무실에 도착하니 간호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곧바로 달려가 보니 신희가 숨을 거두고 있었다.

신희는 죽었다. 아내가 신희의 눈을 감겨주었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들어와 산소 호스와 목에다 심장으로 꽂은 주사바늘을 빼냈다.

신희의 가장 큰 아픔은 어린 두 딸의 문제였다. 아이들은 생명의 본능으로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풀이 죽어 있었다. 항상 누군가가 병원에서 엄마를 지켰는데 모두 집으로 돌아온 것을 보고 엄마는 어디 두고 다 와버렸는가 묻는다.

“엄마는 너무 아파서 예수님이 데려가셨어.”

“어디로 데려갔지?”

“하늘나라로 데려가셨단다.”

“어떻게 올라갔어? 줄을 내려 올라갔어?”

그 말에는 답을 안 했다.

“그럼, 언제 다시 데리고 오시지?”

이담에 너희들이 크면 예수님이 오실 때 데리고 오신단다.

우리는 의논 끝에 정하와 수연이에게는 비밀로 하고 신희의 장례를 치렀다. 온 식구들에게 신희 이야기가 금기처럼 덮여져 있다. 엄마 얘기를 해선 안 된다고 의논이나 한 듯 일체 언급이 없던 정하와 수연이는 드디어 엄마를 어디다 뒀느냐고 물었다.

가장 무서운 말이었다.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는 길을 영원히 떠나버린 엄마의 죽음이 갖는 의미를 소화 못할 아이들에게, 나는 뭔가 대답을 해줘야 했다. 정하는 엄마가 죽은 것을 아는 것 같았다. 그러나 수연이는 마음 속으로 엄마가 돌아올 날을 몹시 기다리는 눈치다. 자꾸 멍하게 하늘을 쳐다보며 이야기하곤 했다.

“저 구름 위에 엄마가 있어? 우리를 보고 있어?”

이사를 갔다. 수연이가 엄마에게 이사간 집과 전화번호를 알려줬느냐고 상당히 심각하게 말했다.

홀아비가 된 사위는 유별나게 신희를 사랑했었다. 사위는 신희의 그림자라도 느낄 수 있게 아이들과 같이 장인 장모인 우리와 함께 당분간 살기로 했다.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자신만의 이 처절한 슬픔, 아픔과 외로움과 그리움, 그리고 무서움. 아이들에게는 엄마의 죽음, 사위에게는 아내의 죽음, 나와 내 아내에게는 딸의 죽음, 아무리 나누어 가져도 가벼워질 수 없는 것이다.

두 딸에게 외국여행 중 매일 같이 전화하던 사위가 날개 부러져 홀로 남겨진 철새처럼 측은하다.

“왜 주님이 이렇게 정하 엄마를 빼앗아 가실까요?”

하고 목이 메이며 신앙적으로도 몸살을 앓는 것을 눈물로 답할 수밖에 없는 나와 내 아내도 측은하기만 하다. 엄마한테 데려다 달라고 생때를 쓰던 수연이도 심상치 않는 분위기로 눈치를 챈 듯 아이답지 않게 표정을 잃어버렸다.

사위는 요새 사람 중에서는 찾아보기 힘들 만큼 순정의 남성이다. 5년의 세월이 지났는데도 사랑 하나로 버티고 살아왔다. 우리는 사위를 위해 아이들 새엄마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두세 사람을 소개해 보았다. 그리고 아이들 의사도 조심스럽게 떠보았다. 새엄마 얘기를 하자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기대 이상 성숙해 있었다. 봇물 터지듯 억눌려 있던 새엄마에의 그리움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자원하는 처녀들도 생겼다. 문제는 사위의 마음이었다. 정신과 의사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다. 정신적인 고자가 된 느낌이었다.

그러던 중, 주님이 도우셔서 이삭의 제 2의 리브가가 나타났다. 심성도, 신앙도, 나이도, 미모도 백점인 새엄마가 미국 이민가족 중에서 나타난 것이다. 사위는 우리에게 그 뜻을 의논했다.

엄마는 모름지기 아이들과 서로의 정서주파가 잘 맞아야 한다. 새엄마가 온다는 날, 두 아이들은 설레어 잠을 설친 듯 했다. 큰아이는 보통인데, 수연이가 더 정서적으로 깊은 탓인지 옛날 시골 처녀가 사랑하는 남자 얼굴을 마주 쳐다보지 못해 등돌려 고개 숙이듯 가슴이 떨려 새엄마 얼굴도 아빠 얼굴도 쳐다보지 못한 채 할머니 할아버지만 쳐다보고 시선을 피한다. 수연이는 사과 깎은 것을 새엄마에게 주고 싶은데 직접 주기 쑥스러운지 포크에 찍어 등뒤로 아빠에게 주면서 전하라는 몸짓을 했다.

새엄마는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안아 주고 싶은데 조심스러워서 망설였다. 그 모습이 한국인의 잃어버린 감정 표현의 완곡성을 읽는 것 같다. 저만치 호젓이 멀리 심산유곡에 피고 싶은 백합꽃일까. 신희의 화신 같은 수연이. 이렇게 새엄마와의 첫 만남은 순정스럽기만 했다.

정하와 수연이는 내게 수수께끼 걸기를 좋아한다.

“할아버지, 왜 손가락이 다섯인지 알아맞춰봐.”

“글쎄다.”

수연이가 말한다.

“내가 가르쳐 줄까? 장갑끼라고 다섯이래.”

손녀딸들과 나 사이는 이렇게 행복했다.

정하와 수연이는 미국에서 새엄마의 사랑과 보호를 받으며 잘 자라났다. 새엄마와 두 아이들과의 관계는 주위 사람들의 칭찬과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한다. 전혀 계모와 전처 자식 관계로 보여지지 않는다.

새엄마는 우리 부부를 친부모처럼 존경하고 있다. 이렇게 착하고 자랑스런 두 딸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새엄마는 늘 말하고 있다. 갈수록 제 엄마 신희의 모습과 성품을 닮아가는 두 아이는 현재 LA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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